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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行狀)
공(公)의 성(姓)은 신씨(申氏)요 휘(諱:돌아간 조상 또는 높은 어른의 이름)는 숭겸(崇謙)인데,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라 하였고 자(字)는 사승(史乘)에 전하지 않는다.
그 선대는 전라도 곡성(谷城) 사람이었더니 뒤에 평산(平山)으로 관향(貫鄕)을 받았다. 곡성은 본시 백제(百濟) 욕내군(欲乃郡)인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곡성군(谷城郡)으로 고쳐졌다가 고려(高麗) 초엽(初葉)에 또 승평군(昇平郡)으로 바뀌었다.
또 이르기를,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광해주는 지금의 춘천(春川)이니 뒷날 이곳으로 이거(移居)한 것인지, 혹은 본관(本貫)이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사서(史書) 및 본전(本傳)에 그러하다.
공(公)은 태어나면서부터 몸이 장대(長大)하고 천성이 용맹스러웠으며, 신령(神靈)한 자품(資稟)과 기민한 지략(智略)에다가 활 쏘는 재주가 뛰어나 백발백중(百發百中)하였으니, 참으로 장수다운 인재(人材)였다.
때에, 신라(新羅)는 정치가 쇠잔해져서 떼도둑이 여기저기에서 다투어 일어났는데 견훤(甄萱:진훤이라고도 한다)은 반역하여 남쪽에 웅거, 후백제(後百濟)라 일컫고, 궁예(弓裔)는 고구려(高句麗)에 웅거, 태봉(泰封)이라 불렸다.
궁예가 몹시 사람을 의심하고 성미가 조급한데다가 흉악(凶虐)한 짓을 날로 일삼게 되자, 따라서 모든 신하들이 저절로 부지하지 못하고, 더구나 백성들은 그 해독(害毒)을 견딜 수 없었다.
당(唐)나라 건부(乾符) 4년(신라 헌강왕 3 서기 877)에 이르러 고려태조(高麗太祖)가 송악군(松岳郡)에서 태어났는데, 날 때부터 영이(靈異)함을 나타내더니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말소리가 우렁차며, 기상(氣象)이 크고 깊으며 너그럽고 두터워 제세(濟世:세상을 구제함)의 도량(度量)을 가졌었다.
당나라 건녕(乾寧) 3년(신라 진성여왕10 서기 896)에 궁예가 세조[世祖:고려태조의 아버지 왕륭(王隆)을 가리킴]의 말을 좇아 태조로 발어참 성주(勃禦塹城主)를 삼고 무릇 당시의 해륙 작전의 임무를 모조리 맡기었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모두 승리를 거두는지라, 그 공로로 누차 승진하여 시중(侍中:신라 때 집사성(執事省)의 으뜸벼슬로 수상격, 고려 때 정승으로도 불렸음)이 됨으로써 위계가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니, 조정 신하들과 장사(將士)들이 흡연(洽然)히 심복(心腹)하였다.
후량(後梁) 정명(貞明) 4년(신라 경명왕2 서기 918) 여름 을묘(乙卯:6월 14일에 해당함)에, 공(公)이 기장(騎將:기마병의 장수)인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과 더불어 은밀히 모의하고 밤에 태조의 집에 가서 고하기를『지금 임금이 정사를 참람히 하고 형벌을 함부로 하여 처자를 죽이고 신하들을 목 베어 없애며,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서 이를 미워하기를 원수 같이 여깁니다. 예로부터 어두운 임금을 폐하고 어진 임금을 세우는 것은 천하(天下)의 대의(大義)이니, 청컨대 공(公)은 은·주(殷·周)의 일(殷나라의 탕왕(湯王)과 周나라 무왕(武王)의 혁명을 가리킴)을 행하소서』하니 태조가 낯빛을 붉히고 거절하면서 말하기를『내가 충의(忠義)로써 자허(自許)하고 있었는데, 임금이 비록 포악하더라도 어찌 감히 두 마음(二心)을 품겠는가. 하물며 나와 같이 덕 없는 사람이 감히 탕무(湯武)의 일을 본 받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때는 만나기 어렵고 잃기는 쉬운 것이요, 하늘이 주는 것을 거두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는 것입니다. 하물며 또 왕창근(王昌瑾)의 거울에 쓰인 글이 저와 같으니, 어찌 하늘의 뜻을 어기어 백성들에게 배반 당한 필부(匹夫)의 손에 죽겠습니까』하였다.
태조의 부인 유씨(柳氏)가 장막 안으로부터 나와서 태조에게 말하기를,『의(義)를 들어 사나움을 치는 것은 예로부터 그러한 것인데, 지금 여러 장수들의 의논을 듣건대 여자라도 오히려 분발되거든, 하물며 대장부이리요』하면서 손수 갑옷을 들어 입혔으며, 공(公)은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부축하여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시켜 외치게 하기를,『왕공(王公)이 이미 의기(義旗)를 들었다』하니, 백성들이 분주히 달려 온 자가 무려 수만명(數萬名)이었다.
궁예가 이 소식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미복(微服)으로 바위골짜기로 달아나 숨었다가, 뒤이어 부양(斧壤:강원도 평강군(平康郡)의 옛이름) 백성들에게 살해 된 바 되었다. 이 달 병진(丙辰:6월 15일에 해당함)에 태조가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고려(高麗)라 하였다.
공(公)이 일찍이 태조를 따라서 평산(平山)을 거쳐 갈 적에, 세 마리의 기러기가 높은 하늘을 날아가고 있으므로 태조가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여 이를 쏘라고 하였는데, 공(公)이 곧 아뢰기를,『어떤 기러기를 쏘리까』하였다.
태조가 분부하기를『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히라』하자 공(公)이 곧 몸을 번듯이 하여 공중을 쳐다보고 시위를 당기되, 화살 한 대로 단번에 이를 쏘아 맞히니 이에 태조가 탄복하며 기이히 여기고, 세 째 기러기가 지나가던 땅을 하사하여 별업(別業:농장(農莊) 또는장원(莊園)과 같음)을 삼게 하고 궁위전(弓位田)이라 이름 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자손들이 대대로 이를 지키어 오고 있다. 후당(後唐) 천성(天成) 2년(고려태조 10 서기 927) 9월(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10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11월임)에, 견훤이 갑자기 신라의 서울인 경주(慶州)에 침입하였는데, 때에 신라왕(제55대 경애왕)은 비빈 종척(妃嬪宗戚)들과 더불어 포석정(鮑石亭:경주 남산에 있던 정자 이름)에 나가서 놀이하다가, 문득 적병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모두 함몰되었다.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위로하며 제사하게 하고서, 정예한 기병 5천을 친히 거느리고 공산 동수(公山桐藪: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서 견훤을 맞아 기다렸는데, 이는 곧 지금의 동화사(桐華寺)이며, 크게 싸웠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견훤의 군사가 도리어 태조를 포위하니 형세가 몹시 위급하였다.
이 때에, 대장(大將)이던 공(公)의 얼굴이 태조와 흡사하였는데, 그 형세가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닫게 되자, 공(公)이 몸으로써 대사(代死:대신 죽음)할 것을 자청하면서 태조를 애수에 숨게 하니, 곧 지금의 부인사(符仁寺)이다. 이에 어거(御車)에 갈아타고,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껏 싸우다가 전사(戰死)하였는데, 견훤의 군사가 공(公)을 태조로 여기고, 그 머리를 잘라서 창에 꿰어 달아나니, 포위했던 군사가 조금 풀리어 태조는 겨우 단신(單身)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태조가 본진(本陣)에 돌아와서 곧 공(公)의 시신을 찾았으나 머리가 없어졌으므로 이를 분간(分揀)할 수 없었더니, 대장(大將) 유검필(庾黔弼)등이 말하기를,『신장군의 왼발 아래에 사마귀(黑子)의 무늬가 있었는데, 북두칠성(北斗七星)과 같았습니다』하는지라 이로써 증험하여 과연 찾아내었다.
이에 목공(木工)에게 명하여 머리와 얼굴(頭面)을 새겨 만들게 하니, 마치 생시의 모습과 같았다. 조복(朝服)을 갖추어 자리에 앉게 하여 태조가 친히 제례(祭禮)를 행하고 통곡하였으며,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장지(葬地)에 옮기게 하여 이에 광해주(光海州) 소양강(昭陽江) 비방동(悲方洞)에 예장(禮葬)하였다.
방동(方洞) 장생내(장승박이 안쪽을 뜻함)의 1품 땅 방(方) 9천보(九千步)와, 이산(伊山) 현촌내(縣村內:고을 마을안쪽을 뜻함) 1품 땅 방(方) 9천보를 하사하여 제수(祭需)를 돕게 하고 백정(白丁) 30호를 옮겨 동내(洞內)에 살리면서 초화(樵火:땔나무와 산불(山火))를 금하게 하였으며 묘소 곁에 원당(願堂)을 두어 명복을 빌게 하고, 또 전사했던 곳에도 원찰(願刹)을 세우니, 이곳이 바로 지묘사(智妙寺)인데, 1품 땅 각각 삼백묘(三百畝) 씩을 하사하였으며, 이어서 해안현(解顔縣:지금 대구광역시 동구)에서는 기름을 절에 바쳐 연등(燃燈:고려때 등불을 켜고 복을 빌었던 불교의식)하는 데 쓰게 하였다. 태조가 공(公)의 죽음을 몹시 슬퍼한 나머지, 공(公)의 아우 능길(能吉)과 아들 보장(甫藏)으로 원윤(元尹:태봉 및 고려의 벼슬이름)을 삼았는데 이는 특히 공(公)의 공훈에 보답하기 위함이었다. 태조가 매양 팔관회(八關會:고려 때 불교에서 유래한 국가 제전(祭典)의 하나)를 베풀어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교환(交歡)할 적마다 유독 전사(戰死)한 공신들이 반열(班列)에 있지 않는 것을 측은히 여기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公)과 김락(金樂)의 상(像)을 짚으로 묶어(結草) 만들게 하여, 조복(朝服)을 입혀서 반열에 따라서 앉게 하고 임금이 더불어 함께 즐기면서 이에 술과 음식(酒食)을 내리기를 명하니, 술이 문득 닳아 마르고(焦乾) 가상(假像)이 일어나서 춤을 추되, 마치 살아 있을 때와 같았는데 이로부터는 음악을 연주하는 자리(樂庭)에 배치(配置)하여 이를 상례(常例)로 삼게 하였다.
아무 해 어느 날(某年月日)에 태조가 공신들에게 크게 봉전(封典)을 행할 때에, 중서문하(中書門下)에서 공(公)의 공적(功績)을 아뢰되, 벽상호기위 태사개국공 삼중대광 의경익대 광위이보 지절저정공신(壁上虎騎衛 太師 開國公 三重大匡 毅景翊戴 匡衛怡輔 砥節底定功臣)이라 하고, 시호(諡號)를 장절공(壯節公)이라 하여 교서(敎書)를 받드니, 어필(御筆)로 중서문하에 대서(大書)하였다. 그리고 치제(致祭)할 때의 전교(傳敎)에서는, 광익효절헌양(匡翊效節獻襄)의 호(號)를 재가(裁可)하여, 칠(柒:직첩을 뜻하는 첩(牒)의오기(誤記)일 듯함)을 하사한 뒤에, 태조묘정(太祖廟庭)에 함께 모시었다.
예종대왕(睿宗大王) 경자년(예종15 서기1120) 가을에 이르러, 임금이 서도(西都:평양을 가리킴)에 순행하여 팔관회(八關會)를 베풀었을 적에는 가상(假象) 둘이 나타나서 잠(簪:옛날 벼슬아치 의관에 꽂는 비녀)을 꽂고 붉은 옷을 입고서, 홀(笏:벼슬아치가 임금을 뵐 때 조복에 갖추어 손에 쥐는 물건)을 쥐고 무장(武裝)을 갖추어 말을 타고 뛰어 달리며 뜰에서 돌아다니는지라, 임금이 기이히 여겨 이를 물으니 좌우에서 말하기를『이는 신성대왕(神聖大王:고려태조를 가리킴)이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할 때의 대사 공신(代死功臣)인 대장군(大將軍)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입니다』하고 곧 그 본말(本末)을 아뢰었다.
임금이 초연히 감개(感慨)하여 두 신하의 후손을 물으니 유사(有司)가 아뢰기를『이 곳에는 다만 김락의 후손이 있습니다』하니, 그에게 벼슬과 상(賞)을 내리었으며, 송도(松都)에 돌아와서는 공(公)의 고손(高孫)인 경(勁)을 불러 보문각(寶文閣:경연(經筵)과 장서(藏書)를 맡은 관청, 예종11년 설치)에 들게 하여, 조종(祖宗)의 원시(原始)와 자손 남녀(男女)의 수(數)를 묻고 주과(酒果)와 또 비단(綾羅)을 한 사람에게 각각 열 끝(端) 씩을 내리고, 이어서 사운(四韻:네 글자의 각운(脚韻)으로 된 율시(律詩)) 일절(一節)과 단가(短歌:노래의 한가지) 이장(二章)을 지어서 내리었는데 시(詩)에 이르기를,
『두 공신의 가상(假像)1)을 바라보노니 저절로 느꺼워라 눈물겨워라 팔공산(八空山)2)옛 자취는 아득하건만 평양(平壤)엔 기이한 일 끼치어 있네. 충의(忠義)는 천고(千古)에 또렷도 할싸 죽고 삶은 한 세상 그 뿐이로세 임을 위해 그 목숨 즐겨 바치어 이 나라 굳은 터전 이룩하였네』

라 하고 노래(歌)에 이르기를,
라 하였다. 또 전교(傳敎)하여 이르기를, 『그대가 늙었다고 하여 벼슬을 사양하려 하지만 나는 내조(乃祖:그대의 할아버지라는 뜻)가 임금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고 대사(代死)한 공(功)을 가상(嘉尙)히 여겨 의당 벼슬과 상(賞)을 더하여 원훈(元勳)에 보답하리라』하더니 이듬해에 이르러 마침내 적경실부사(積慶室副使)를 제수하고, 경(勁)의 아들 유비(愈毗)에게는 다방(茶房)에 속하여 좌우(左右)에 근시(近侍)케 하고, 유비의 아들 명부(命夫)에게는 전지(田地)를 신고하여 도감(都監)에서 변정(辨整)하여 사전문(賜田文:땅을 하사하는 문서)을 고쳐 주게 하였다.
대저 천명(天命)이 참된 임금(眞王)에게 돌아갈 줄을 아는 것은 밝음이요, 매양 정벌(征伐)에 종사하여 공이 있는 것은 용맹함이요, 한 화살로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힌 것은 재주 있음이요, 위급(危急)에 임하여 대신 죽기를 꺼리지 않는 것은 충성됨이요, 죽어서도 살았을 때와 같은 것은 신이(神異)함인데, 여기에 하나만 있더라도 오히려 의당 정표(旌表)하고 포상(褒賞)해야 하거든, 하물며 이에 전체를 두루 갖추었으니 어찌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조선에 이르러 고려태조의 사당을 마전(麻田)의 고을에 세울 적에도 공(公)을 여기에 배향(配享)하였고, 왕씨(王氏) 후손을 봉(封)하여 세습(世襲)하여 제사를 받들어 영세(永世)토록 폐하지 않게 하니, 공의 공덕(功德)은 길이 천지(天地)와 더불어 빛을 전할 것이다. 어찌 거룩하지 아니한가.
아! 공(公)의 재주와 공덕(功德)으로도, 굶주린 호랑이의 입에 먹히어 끝내 크게 펼치지 못했음은 천운(天運)이라 할 것이니, 하늘이 장차 그 보답을 크게 하여 그 후손(後孫)들을 번창(蕃昌)하게 할 것이다.
송(頌)하건대, 세상에 창업지주(創業之主)가 나오면 반드시 호걸지사(豪傑之士)가 나서 이를 위하여 보익(輔翼)하는 것이니, 한(漢)나라의 삼걸(三傑:소하 장량 한신을 가리킴)과 당(唐)나라의 방두(房杜:방현령과 두여희를 가리킴)가 이같은 것이다.
비록 그러나, 세상에서는 한갓 한나라의 일어남이 삼걸의 힘에 연유(緣由)한 줄만 알고, 한고조(漢高祖)의 화(禍)를 벗어남이 기신(紀信)의 죽음에 있었음을 알지 못하며, 당나라의 일어남이 방두(房杜)의 꾀함에 연유한 줄만 알고, 당태종(唐太宗)의 난(難)을 모면함이 울지경덕(尉遲敬德)의 구(救)함에 있었음을 알지 못하니, 가령컨대 팽성(彭城)의 싸움에서 기신이 없었더라면, 한(漢)나라도 가히 알 수 없었을 것이요, 왕세충(王世充)의 포위에 울지경덕이 없었더라면 당나라도 가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고려태조가 공산 동수(公山桐藪)에서 견훤의 군사에게 포위되었을 적에, 위급하기가 일발(一髮)을 용납하지 않았으니, 이 때에 공(公)이 죽지 않았더라면 포위는 풀리지 않았을 것이요, 포위가 풀리지 않았더라면 싸움도 이기지 못하여 저 임금이라는 분이 바로 도마 위의 한 덩이 고기일 뿐이었으리라. 저 삼한(三韓)을 통일(統一)하여 오백년(五百年)의 왕업(王業)을 이어받게 한 바 공(功)이 여기에 있지 아니한가.
대저, 사람이 누가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지 않으리요마는 난리(亂離)를 당하여 내 몸을 잊고, 위급(危急)을 보고 목숨을 바칠 자가 이 세상에 몇 사람이겠는가. 오직 공(公)이야말로 지략(智略)으로써 그 변(變)에 응하고, 충의(忠義)로써 그 임금에게 도모하고, 용맹으로써 그 머리를 잃어, 안에서 우러남이 인(仁)에 근본하고 밖으로 나타남이 의(義)에 합치했으니, 공(公)의 공(功)은 태산이 우뚝하되 이만 높지 못하고, 공(公)의 이름은 천추(千秋)에 뚜렷하여 능히 없어지지 못할 것이며, 가위 천고(千古)에 뛰어난 열장부(烈丈夫)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장절(壯節)로써 시호함이 진실로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
저 가상(假像)이 일어나서 춤추기를 생시(生時)와 같이 했다고 함과 같은 것은 이는 공(公)이 정기(正氣)를 온전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요, 공(公)이 하늘과 더불어 덕(德)을 함께한 때문일 것이다. 기신(紀信)이나 울지경덕(尉遲敬德)의 무리 같은 것은, 비록 한(漢)나라, 당(唐)나라에 공을 세웠으되 공(公)의 풍성(風聲)에 비긴다면 오히려 이만 못할 것이다.
공(公)의 충훈(忠勳)과 장절(壯節)이 저와 같으니, 진실로 그 행장(行狀)을 기록하여 후세(後世)에 길이 전함으로써 신하되어 불충(不忠)한 자를 부끄럽게 하고 자손 되어 불초(不肖)한 자를 깨우치게 함이 마땅하려니와, 세대가 오래되어 기록(記錄)을 잃게 된다면 그 죄과(罪過)가 후손에게 있는지라, 감히 옛 행적(行蹟)을 상고하고 유사(遺事)를 펼쳐 덧붙여서 삼가 위와 같이 적는다.
1) 가상(假像) : 나무로 새기거나(刻木) 짚으로 묶어서(結草) 사람 형상을 만든 것인데, 고려사 예종(睿宗) 15년조의 우상(偶像)도 같은 뜻이다.
2) 팔공산(八空山) : 장절공의 순절한 곳인 공산 동수(公山桐藪)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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