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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기행(전주 강암 고택 아석재)
거연천석
2011. 2. 2. 19:38
[조용헌의 백가기행]전주 강암 고택 아석재 물과 돌 곁에서 유연하고 단단하게 살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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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달리 특이한 경로로 집을 장만하는 사람도 있다. 친구들이 돈을 걷어 도와줘서 집을 갖는 경우다. 역사적으로 그 예를 살펴보면 북송 北宋의 도학자인 소강절邵康節(1011~1077년)이 그러하였다. 가난한 소강절은 그의 친구들 20여 명이 돈을 모아 낙양의 천진교 天津橋 옆 언덕에 소옥 小屋을 지어주었다. 그 집의 이름이 안락와 安樂窩였다. ‘안락한 토굴’이라는 의미다. 이 친구들이 누구인고 하니 <자치통감 資治通鑑>을 지은 사마광 司馬光과 그 일당이다. 왕안석 王安石의 신법당과 대립하던 당대 북송의 구법당 소속 명류들이 소강절을 후원한 것이다. 사마광은 소강절을 형님처럼 따르고 좋아했다고 한다. 북송의 소강절만 그런 줄 알았더니만, 전주의 서예가이자 유학자인 강암 剛菴 송성용 宋成鏞(1913~1999년)의 집도 친구들이 마련해주었다. 1965년 김제에 살고 있던 강암을 전주로 오게 하기 위해서 친구들이 나서서 강암의 서예 작품을 전시하게 하였고, 그 서예 작품을 모두 구입하여 그 대금으로 집을 구입한 것이다. 당시 집값은 63만 원이었다고 전해진다. 전주시 교동에 있는 강암의 고택인 아석재는 남향집인데, 집 앞에 전주천 全州川이 흐르고 있다. 아석재 앞으로는 전주천을 가로지르는 남천교 南川橋가 놓여 있다. 천진교 옆에 안락와가 있었다면, 남천교 옆에는 아석재가 있는 셈이다. 최근에 이 남천교 위에 기와로 지붕을 얹고, 목재로 기둥을 세워 청연루 晴煙樓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모습이 천년 고도 千年古都다운 격조가 있고 고풍이 완연하다. 완산팔경 完山八景 가운데 하나가 ‘한벽청연 寒碧晴煙’이다. ‘한벽’과 ‘청연’을 대구 對句로 사용해서 다리 위쪽으로 한벽루가 있으니, 그 아래쪽에다 청연루를 지은 것이다. 강암 말년에는 고택 터 일부에 강암 서예관을 지었다. 우리나라에서 붓글씨인 서예만을 위한 갤러리를 만든곳은 오직 이곳뿐이라고 한다. (왼쪽) 강암 송성용을 위해 친구들이 돈을 모아 마련해준 아석재는 외모가 무척 검박하나 그 속에 품은 콘텐츠는 아주 풍부한 집이다. ![]() (오른쪽) 집의 당호 ‘아석재’는 ‘물과 돌있는 데서 유연하게 살리라’라는 뜻을 담고 있는 주자의 시구절 ‘거연아천석 居然我泉石’에서 유래한다. 같은 예향이라고 해도 전남은 그림이요, 전북은 글씨인것이다. 물론 전남에도 진도 출신의 걸출한 서예가인 소전 小筌 손재형 孫在馨이 있다. 소전은 왜정 때부터 이름을 날리던 서예가로 1970년대에 고 박정희 대통령의 서예 선생이기도 하였다. 일본의 후지스카 교수가 일본으로 가져간 추사의 ‘세한도’를 해방 무렵에 일본에까지 찾아가 사정사정하여 다시 찾아온 인물이 바로 소전 손재형이다. 그러나 소전은 전남에서 거주하며 후학을 양성하지는 않았고, 일찌감치 서울을 주 무대로 활동했다. 반면 강암은 상투와 한복을 입고 고집스럽게 전통을 고수하면서 전주에 살았다. 강암의 그 고집스러움과 지조가 어려 있는 집이 바로 아석재이고, 이 아석재가 전북의 글씨(서예)를 대표하는 집이 된 것이다. ![]() (왼쪽) 고택 옆에 있는 ‘강암 서예관’은 강암 말기에 지은 서예 전문 갤러리다. ![]() 1 집은 안채에 비해 정원이 큰것을 알 수 있다. 일부는 길로 내어주고, 일부는 강암 서예관 터로 내주어 상대적으로 남아 있는 정원이 크게 느껴지는 것. 2 대자리와 수석 등 소박한 가풍을 느낄 수 있는 소품들. ![]() 3 아석재의 유래가 된 현판 ‘거연아천석’. 4 기둥에는 총 8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그렇다면 소전, 일중, 유당 같은 당대의 일급 대가들이 왜 전주까지 내려와 강암의 집에 들렀을까. 같은 업종이라 들른 것일까? 필자는 강암이 지닌 카리스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카리스마는 유학과 선비의 전통을 고집스럽게 지킨, 강암이 보유한 무형의 재산이었다. 물론 강암의 글씨 탓도있겠으나, 글씨 이전에 강암이 지닌 인간적 매력이 작용했다고 보인다. 우선 강암은 패션이 남달랐다. 죽을 때까지 상투와 갓을 착용하고 한복을 입었다. 강암은 모든 불편을 감수하고 이 유학자의 복장을 고수했다. 복장이 정신을 규제할 수도 있다. 상투와 갓을 쓰면 선비다운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강암의 지론이었다. ![]() (왼쪽) 평생 붓을 놓지 않은 강암 송성용 선생. 전국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을 위해 글씨를 써주셨다. 고향 산천 전통을 고수한 강암의 이러한 전통 고수는 선대의 가르침에서 유래하였다. 강암의 부친이 바로 유재 裕齋 송기면 宋基冕(1882~1956년)이다. 유재는 전북에서 소문난 유학자였다. 호남 3재의 한 명으로 구한말 기호학파의 종장이던 간재 艮齋 전우田愚의 고제였다. 유재는 글씨도 잘 쓰고 문장도 좋았지만, 행실이 더 뛰어나다고 칭송받던 선비였다. 유재는 창씨 개명을 하지 않고 끝까지 일제의 탄압에 맞섰으며, 상투와 갓을 지켰다. 이런 전통이 아들인 강암에게 유언으로 전달되었다. 강암의 부인은 ‘호남 3재’ 가운데 다른 한 명인 고재 顧齋 이병은李炳殷의 여식이었다. 이 고재가 바로 전주향교의 맥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고재가 아니었으면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혼란기에 전주향교의 맥이 끊어졌을것이라고 회자된다. ‘호남 3재’는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향에 남아서 일제에 절대로 협력하지 않았다. 자기 자존심을 지키면서 제자 양성과 유교 전통을 지키는 데 평생을 헌신하였다. 이것이 바로 간재의 사상이기도 하였다. 일부에서는 일제강점기에 부안의 계화도 繼華島에 들어간 간재를 비판한다. 유학자이면서 총을 들고 독립운동을 안 했다고. 전라도는 동학 때 다 죽었다. 죽창과 낫을 들고 정의를 위해 분연히 일어섰지만 결과는 모두 떼죽음이었다. 간재는 이 동학의 처참한 죽음을 뼈저리게 보았을 것이다. 총들고 나간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남아서 제자를 양성하고 유학의 맥을 지키는 일이 진정 자신이 할 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간재로부터 발원해 제자인 유재, 고재로 다시 내려왔으며, 이 정신이 아들인 강암에까지 이어지지 않았나 싶다. 다들 도시로 나가거나 일본으로 유학을 갔지만, 고향 산천에 남아서 전통을 지킨다. 누가 알아주든지, 안 알아주든 지킨다. 필자가 볼 때는 이것이 아석재에 남아 있는 가풍이라 여겨진다. 강암의 자식은 다 잘되었다. 장남인 송하철은 관선 전주 시장을 지냈고, 2남인 송하경은 성균관대 교수로 유학대 학장을 지냈으며, 서예가로서 일가를 이루어 국전 심사위원도 하였다. 3남인 송하춘은 고려대 국문과 교수로서 문과대 학장을 지냈고, 4남인 송하진은 현재 민선 전주 시장을 하고 있다. 이들 사 형제의 공통점은 모두 글씨를 잘 쓴다는 점이다. 집안이 잘되려면 3대가 모두 힘을 써야 한다. 조부 때 기초를 닦고, 아버지 때 빛을 발하고, 손자 때에 그 빛을 계승해야 하는 것이다. 아석재의 강암 집안은 이 공식에 딱 들어맞는다. ![]() 강암 서예관에서 바라본 교동 풍경. 아석재 앞에는 전주천이 흐르고 고덕산 자락이 집 앞산을 이룬다. 정면에 보이는 다리 위 정자의 현판 역시 강암 선생이 쓴 것. 아석재 앞에는 전주천이 감아 돈다. 풍수지리상 물은 곧 돈인데, 감아돌아야 돈이 모인다. 냇물 건너편에 자리한 안대 案對도 좋다. 고덕산자락이 집 앞산을 이루고 있다. 그 산자락 가운데 오른쪽으로 내려온 봉우리는 생김새가 삼각형인 필봉 筆鋒이다. 대서예가의 집에 어찌 필봉이 없겠는가? 생가필봉 生家筆鋒이요, 거가필봉 居家筆鋒이라! 호남 예향의 양대 맥이 전남은 그림이요, 전북은 글씨인데, 그 전북 글씨의 종장이 살던 집이 바로 전주 남천교 옆의 아석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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