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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빚

거연천석 2016. 9. 12. 08:07
마음의 빚


번역문
   처음에 박태한이 이광좌, 최창대와 함께 서로 약속하기를, “우리가 급제하거든 신래(新來)에 응하지 말자.” 하였었다. 갑술년(1694, 숙종20) 별시(別試)에 세 사람이 동시에 급제하였다. 동료들은 박태한이 자신이 결단한 일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 결코 시속(時俗)에 응할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애당초 찾아가 신래불림[呼新來]을 요구하는 자가 없었다. 이광좌는 좌주(座主)인 정승 남구만(南九萬)이 와서 신래불림을 하라고 하였으나 그 역시 끝끝내 응하지 않고는 “대감께서 대신(大臣)으로서 선생이 되어 신진(新進)을 가르치면서 자신을 바로잡고 임금을 섬기는 도리로 하지 않고, 홍분방(紅粉榜)의 유풍을 하게 하십니까?” 라고 하였는데 남구만이 웃으며 이를 허용하였다. 최창대는 그 아버지의 명령이 허락지 않아 부득이 시속을 좇았다.
원문
初朴泰漢與李光佐崔昌大, 相約“吾輩登第, 勿應新來.” 甲戌別試, 三人同榜, 儕友知泰漢執決, 無應俗之理, 初無往呼新來者. 光佐則南相九萬以座主來呼, 亦終不應, 曰:“大監以大臣, 爲先生敎新進, 不以正己事君之道, 使爲紅紛榜餘習耶?” 九萬笑而許之. 昌大則以親命不許, 不得已從俗.

- 이긍익(李肯翊 1736~1806),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별집(別集) 권10, 「관직전고(官職典故)」


해설
   윗글에 나오는 박태한(朴泰漢), 이광좌(李光佐), 최창대(崔昌大) 세 사람은 1694년(숙종20) 같은 해에 과거에 급제한 벗들입니다. 박태한은 1664년생, 이광좌는 1674년생, 최창대는 1669년생이니, 당시 과제에 급제했을 때의 나이가 31세, 21세, 26세인 풋풋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급제하기 전부터 신래(新來)의 폐해에 공감하여 급제하면 이를 거부하자고 약속했습니다.

 

   ‘신래’란 새로 과거에 급제한 자나 선비로 있다가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간 자를 일컫는 말로, 오늘날의 신입, 신참의 의미입니다. 당시에 이들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로 허참례(許參禮)와 면신례(免新禮), 회자(回刺) 등의 의식이 있었습니다. 허참례란 그 관사에 새로 나온 관원이 고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며 인사를 드리고 처음으로 그 세계에 참여를 허락받는 의식이고, 이로부터 얼마 뒤에 다시 좀 더 거하게 대접하는 면신례를 베풀어야 비로소 신래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근무처에 배속되면 자신의 신상을 적은 명함[刺紙]을 가지고 그 부서의 고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하는 회자 또한 무척 고된 일이었습니다.

 

   신래가 치러내야 할 이러한 절차들은 고려 말에 불공정하게 과거에 합격한 권문세족의 나이 어린 자제들이 교만하고 뻣뻣하게 구는 것을 꺾기 위해 기존 관원들이 고안해 낸 ‘신참길들이기’ 의식에서 유래하였답니다. 윗글에서 말한 홍분방(紅粉榜)은 바로 고려말에 과거에 합격한 연소자들을 젖내 나고 분홍색 옷을 입은 자들이라고 비꼬던 말입니다. 그런데 신참을 골려주려던 장난스런 일들이 조선에 와서 점차 변질되어 축하연 자리에 어김없이 기생들이 등장하고 신참에게 벌주(罰酒)를 마시게 하고 춤을 추게 하는가 하면 한겨울에 물에 집어넣기도 하고 한여름에 볕을 쬐게 하여 이 때문에 병을 얻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중종실록』36년 12월 10일) 뿐만 아니라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에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 토지나 노비를 파는 것은 물론이고 부잣집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자가 있을 정도로 부담스런 절차가 되었습니다.

 

   세 사람은 자신들만은 이런 시속(時俗)을 따르지 않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급제 이후에 나타난 세 사람의 삶의 궤적은 좀 달랐습니다.

 

   박태한은 윤증(尹拯)의 제자로, 평소에 한번 결단한 일에 대해서는 고집을 꺾지 않는 사람으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결코 시속에 응할 리 없을 거라고 판단한 동료들은 그에게 아예 이런 의식을 거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그는 평소의 처신 덕에 벗들과의 약속을 힘들이지 않고 지킬 수 있었습니다. 박태한은 시속을 따라 처신하는 것이란 마치 겨우 움집을 짓는 것이나 같아서 아무리 공을 들이고 일을 잘하려 해도 결국엔 그 규모가 협소하고 남루할 수밖에 없게 되니 명당(明堂)을 짓는 것처럼 웅대한 기상을 가지려면 도학(道學)을 따라 처신해야 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었습니다.(박태한(1664~1698)의 『박정자유고(朴正字遺稿)』 부록하(附錄下), 「정자박공유사(正字朴公遺事)」

 

   이광좌는 어떤가요? 그는 스승처럼 떠받들어야 할 자신의 시관(試官)에게 큰소리를 치면서 신래가 으레 해 오던 의식을 거부하였으니, 얼핏 보면 그가 셋 중에 가장 대단한 기개를 가진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허나 그의 이러한 기고만장한 행태를 웃음으로 받아준 남구만(南九萬)의 아량이 없었다면 아마 이광좌의 관로(官路)는 막혔을 지도 모릅니다. 남구만은 면신례란 의관을 입은 선비들의 수치이고 더러운 습속이니 일체 금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청할 정도로 면신례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광좌가 남구만을 시관으로 만나게 된 것은 참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광좌가 시속을 거부하고도 무사히 영전(榮轉)에 영전을 거듭하며 영의정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기개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만난 행운 즉, 시운(時運)을 탔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최창대는 벗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부친의 뜻을 좇아 시속을 따랐습니다. 그의 부친 최석정(崔錫鼎)은 정자(程子)도 의리에 해가 되지 않는 일은 시속을 따라도 괜찮다고 하였고, 공자(孔子)도 사냥에서 잡은 짐승의 수량으로 내기하는 엽각(獵較)을 하였다는 등의 말로 아들과 아들의 친구인 이광좌까지 타일렀습니다. “선비의 책무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자질구레한 일은 우선 풍속에 순응하라.”고 말입니다.(최석정(崔錫鼎 1646~1715)의 『명곡집(明谷集)』 권13, 「여이광좌서(與李光佐書)」)

 

   불합리한 시속을 고쳐보자던 젊고 두려울 것 없던 세 청년은 이 일화 이후에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박태한은 과거에 급제한 지 4년 만에 병사(病死)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당대의 시속의 폐해를 바꾸기 어렵다는 것에 낙담하였던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광좌와 최창대 모두 박태한에 대한 유사(遺事)를 남긴 것으로 봐서 짧은 생을 살다간 그를 오래도록 잊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최창대는 그와 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데 대해 마음의 빚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후일담을 적었습니다.

 

   내가 회자(回刺)가 끝난 뒤 박형에게 서찰을 보내 “도깨비 같은 짓을 억지로 할 수 밖에 없었으나 신래를 조롱하고 함부로 대하는 행태까지도 남들을 따라 같이 하였으니, 진정으로 형님과 거취를 같이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라고 하였다. 박형이 짤막한 편지로 답하였다. “천하의 일은 매번 남을 따르는 것으로 인해서 무너졌네.” 나는 다시 부끄러웠다. [余回刺罷後, 書報朴兄云, “鬼行旣不免强就, 而至於嘲詼褻謔, 亦多隨人同波者, 眞悔不與吾兄同去就也.” 朴兄答以短札, 有曰“天下事, 每因隨人壞了.” 余復悚然.] (최창대(1669~1720)의 『곤륜집(昆侖集)』권20, 「박형교백유사(朴兄喬伯遺事)」)

 

   살아가면서 한때 뜻을 같이 했던 사람 중에 어떤 이는 불의(不義)가 고쳐지지 않는 것에 낙담하여 병(病)이 들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신도 모르게 시운(時運)을 타서 성공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예전에 그렇게 결정한 것이 과연 최선이었을까 의심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살아갑니다, 우리가.


김진옥
글쓴이김진옥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

주요 역서 및 논문
  • 『한국문집총간』해제 작성, 『일성록』 번역, 『조선왕조실록』 재번역 사업에 참여
  • 『金吾憲錄』의 자료적 가치, 『민족문화』36호, 2015
  • ‘推考’의 性格과 運用, 『고전번역연구』제3집, 201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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