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한문 음미

중용 제1장

거연천석 2012. 2. 2. 08:43

天命之謂性이요 率性之謂道요 修道之謂敎니라

천명지위성이요 솔성지위도요 수도지위교니라

 

직 역

하늘이 명한 것을 일러 성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일러 도라하고, 도를 닦는 것을 일러 가르침이라고 한다.

 

의 해

학문의 이치는 성과 명보다 더 정밀한 것이 없고, 일은 도와 가르침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른바 성과 도와 가르침을 아는가? 천하 사람들에게 모두 성품이 있으니, 성은 바깥에서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늘이 사람을 내실 때에 이미 기운을 주어서 형체를 이루고 또 반드시 이치를 실어주어서 성품을 이룬다. 사람이 이것을 받아서 인(仁)과 의(義)와 예(禮)와 지(智)의 덕으로 삼는다. 이것이 성품이 하늘에 근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명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천하의 일에는 모두 도가 있으니, 도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성 가운데 온갖 이치가 다 갖추어져서 사람이 각각 그 성의 자연스러움을 따르면 날마다 쓰는 사물 사이에 스스로 지극히 마땅하여 바꾸지 못할 이치가 있게 된다. 이것이 도가 성에서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을 따른다'고 말하였다. 성인이 법을 세워서 천하를 인도하면 가르침이 있게 되니, 가르치는 것은 사람에게 본래 없는 것을 가지고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성과 도가 비록 같지만 기질이 혹 다를 수가 있어 모두 도에 합하지 못한다. 성인은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하는 도를 근거로, 등급을 구별하고 절차와 상황에 알맞게 절제하여 천하에 법을 만들어,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자로 하여금 모두 중용을 얻도록 하였다. 이것이 가르침이 도를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닦는다'고 말하였다. '성과 도와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들은 그 근본이 모두 하늘에서 나온 것이지만, 실상은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道也者는 不可須臾離야니 可離면 非道也라 是故로 君子는 戒愼乎其所不睹하며

도야자는 불가수유리야니 가리면 비도야라 시고로 군자는 계신호기소불도하며

 

恐懼乎其所不聞이니라

공구호기소불문이니라

 

직 역

도는 잠깐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는 것이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경계하고 삼가며 그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한다.

 

의 해

도는 성으로부터 나오고 가르침은 도에서부터 이루어지니, 도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과 사물이 모두 따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르면 다스려지고 잃으면 어지러워지니, 사람이 마땅히 체득해서 합하여 하나가 되어, 비록 잠시라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며 이것은 몸 밖의 존재가 되어 성을 쫓는 도가 아니다. 도가 떠날 수 없는 것이 이와같기 때문에 가르침을 따라 도에 들어가는 군자는 반드시 그 도를 체득하는 공부를 정밀하게 하여 마음이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해야 한다. 눈에 보인 뒤에 경계하고 삼갈 것이 아니라, 비록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모든 형상에 접하지 않을지라도 그 마음이 항상 경계하고 삼가서 감히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귀에 들린 뒤에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비록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아무런 느낌이 없을지라도 그 마음이 항상 두려워하여 감히 잊지 말아야 한다. 마음을 보존하고 기르는 공부가 항상 지속되어 천리의 본연을 보존하여 잠시라도 떠나지 않도록 해야 한는 것이다.

 

莫見乎隱이며 莫見乎微니 故로 君子는 愼其獨也니라

막현호은이며 막현호미니 고로 군자는 신기독야니라

 

직 역

어두운 곳보다 잘 보이는 곳이 없으며 작은 일보다 잘 나타나는 것이 없으니, 그러므로 군자는 그 홀로 아는 곳을 삼간다.

 

의 해

도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니 군자는 마땅히 보존하고 기르는 공부를 정밀하게 해야 하지만, 더 간절하고 중요한 곳에서 마땅히 삼가야 한다. 장소로 말하자면 그윽한 가운데가 어두운 곳이고, 일로 말하자면 한 생각의 움직임이 작은 일이다. 생각이 싹터서 막 움직일 때에 그 자취는 비록 드러나지 않았으나 기미는 이미 움직여 착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과 악한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은 비록 알지 못하지만 나는 홀로 안다. 이것이 곧 '천하에 드러나 보이는 것이 어두운 곳보다 더한 것이 없고, 천하에 밝게 나타나는 것이 작은 일보다 더한 것이 없다'라는 것이다. 이에 삼가지 않으면 후에 미쳐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군자는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어둡고 작아 나만 홀로 아는 곳에서 더욱 더 삼가 한 터럭만큼이라도 착하지 않는 것이 은밀하게 불어나고 은밀하게 자라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요 發而皆中節을 謂之和니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이

희노애락지미발을 위지중이요 발이개중절을 위지화니 중야자는 천하지대본야이

 

요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니라

요 화야자는 천하지달도야니라

 

직 역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이 아직 발동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발동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이르니, 중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는 천하에 두루 통하는 도이다.

 

의 해

도는 떠날 수 없으니, 군자는 진실로 경(敬)을 주로 하는 공부를 정밀하게 해야 한다. 이 도의 온전한 본체와 작용은 본래 내 마음의 본성과 감정에 달려 있다.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 네가지는 사람이 모두 똑같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다. 아직 발동하지 않았을 때에는 마음에 한 가지 사물도 없으며, 치우침도 없고 기울어짐도 없어서 흡족하게 가운데 있으니 이것을 '중(中)'이라 한다.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에는 그 차체에 스스로 당연한 이치가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절도이다. 발동하여 모두 절도에 맞으면, 하는 일이 모두 마땅하여 당연한 이치와 서로 거스르고 어그러짐이 없으니 이것을 일러 '화(和)'라고 한다. 중(中)이 라는 것은 본성의 덕이고 도의 본체이다.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지만 천하 사물의 이치가 모두 구비되어 있으니 이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다. 화(和)라는 것은 감정의 바름이고 도의 작용이다. 감동하여 서로 통해서 옛날과 지금, 사람과 사물이 한결같이 절도에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이것은 천하에 두루 통하여 행해지는 도이다. 중과 화는 나의 본성과 감정이 되는 것으로서, 도의 본체와 작용이 곧 여기에 있다. 도가 내 마음의 근본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어찌 떠날 수 있겠는가? 군자가 보존하고 기르고 살피는 공부는 반드시 이것을 따라 정밀함을 더해야 한다.

 

致中和면 天地位焉하며 萬物이 育焉니니라

치중화면 천지위언하며 만물이 육언니니라

 

직 역

중(中)과 화(和)를 이루면 천지가 자리를 잡으며 만물이 길러진다.

 

의 해

군자는 이 도의 본체와 작용이 사람의 마음에 갖추어져서 큰 근본을 세우지 않을 수 없고 천하에 두루 통하는 도를 행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이에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공부를 다 하여 더욱 엄하고 더욱 공경해서, 보고 듣는 것에서부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지극히 고요한 곳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치우치거나 기울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 중(中)을 충분히 다 이루면, 하늘이 명한 성이 온전하게 되고 큰 근본이 서서 날로 굳어질 것이다. 더욱 홀로 삼가는 공부를 보다 정밀하고 보다 주밀하게 해서 은미한 가운데서부터 사물에 응하는 때에 이르기까지 한 터럭도 어그러지고 틀림이 없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화(和)를 충분히 다 이루면 성을 따를 도가 모두 구현되어 천하에 두루 통하는 도를 행하는 것이 날로 넓어질 것이다. 그러나 중과 화는 한 사람의 중과 화가 아니고, 천지 만물이 하나같이 가지고 있는 중과 화이다. 중과 화를 극진하게 이루면 고요할 적에 한 번 숨 쉬는 사이라도 중이 아님이 없을 것이다. 내 마음이 바르고 천지의 마음이 또한 바르게 되기 때문에 음과 양, 움직임과 고요함이 각각 제자리에 머물러서 천지가 이에 편안할 것이다. 중과 화를 이미 극진하게 이루면 움직일 적에 한 가지 일이라도 화(和)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나의 기운이 순조롭고 천지의 기운이 또한 순조로워지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서로 통하여 만물이 이에 길러질 것이다. 여기에 이르면 도를 닦는 가르침도 또한 나에게서부터 나와서 진실로 도에서 떠나지 못할 것이다. 중과 화가 극진하게 이루어지면 화(化)하는 경지에 이르니 처음에는 불가능할 것 같지만, 그 일을 궁구해보면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함과 홀로 아는 곳을 삼가는 데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가르침을 따라 도에 들어가는 군자 극진하게 닦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유교문화영구소 옮김-

 

'신기독(愼其獨)'에 대하여

'홀로임을 삼가다'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 무엇에 대하여 삼가는 것이란 무엇일까? 내가 처음 중용을 읽으면서 홀로임을 삼가는 것은 단순히 자신이 혼자일 때의 그 현상 자체로 이해 하였었다.

 

사람을 분류할 때 타율적인 인간과 자율적이 인간으로 분류한다면 우리가 지향해야할 인간상이란 자율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누가 본다고 해서 바르게 행동하고 보지 않는다고 해서 멋대로 행동한다면 자율적인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시험을 치는 교실에서 감독자가 없다고 해서 남의 답을 엿본다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답을 작성한다면 어떨까 아니면 질서유지를 위해 정한 규칙을 남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지키지 않는다면 이 또한 좋지 않은 것이다 결국 바람직한 인간상이란 솔선수범하는 자율적인 인간상이어야지 타율적인 인간이 된다면 이것은 바로 노예근성이라고 생각한다

 

옛 사람들은 '신독(愼獨)'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아호(雅號)나 당호(堂號)로 정하여 '신독'을 내면적 자기성찰의 으뜸으로 삼아 항상 머리맡에 좌우명처럼 써 붙이고 '자신의 그림자에 부끄럽지 않게 그리고 잠자리에서도 이불에 한 점 부끄럼이 없도록' 행동거지 하나 하나를 삼가면서 생활하기를 노력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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