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변잡기/나의 이야기

'대가야 박물관'에서 만난 '점필재 김종직'

거연천석 2011. 6. 20. 21:53

대가야의 도읍지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토기와 철기, 가야금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던 대가야.

 

 12가야라서 가야금이 열두줄?

 

 

 

 

 

 

김종직(1531, 세종 13~1492, 성종23)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본관은 선산, 자는 효관. 계온, 호는 점필재, 시호는 문충이다. 1431년(세종 13)에 밀양의 서쪽 대동리(대동리, 한골)에서 태어났다. 1457년(세조 3) 유명한 '조의제문'을 짓고, 1459년(세조 5)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1470년(성종 원년) 함양군수로 부임하면서 문하에 학도가 운집하여 김굉필. 정여창 등이 수학하였다.

그 후 10여년간 문한(文翰). 사관(史官). 경연관(經延官). 전주(銓主)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계속 맡았다.

1489년(성종 20) 밀양으로 낙향하여, 학문과 후학지도에 전념하다가 1492년(성종 23) 8월 19일에 돌아가셨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부관참시 되었다가 1507년(중종 2)에 중종 반정으로 벼슬과 시호 등이 되돌려졌다. 1689년(숙종 15) 영의정에 증직되고, 1708년(숙종 34) '문간'에서 '문충'으로 시호가 고쳐졌다. 밀양의 예림서원을 비롯하여 김천의 경렴, 선산의 자양, 함양의 백연, 개령의 덕림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김종직은 1443년(세종 25) 13세 때 아버지인 강호 김숙자 선생이 고령 현감으로 부임했을 때 고령에서 주역을 배웠다. 그 후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인해 부관참시 될 때 아들 숭년이 화를 면해 잠시 합천에 머물다가, 그 후손이 1650년경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개실마을로 옮겨 살게 되었다.

<대가야 박물관 제공>

 

 

'조의제문' 이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의제(義帝)를 조문하는 내용으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