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행복이 가득한 집' 의 발행인 (주)디자인 하우스 대표인 이영혜님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우리들의 어머니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감동을 함께 하고자 그대로 옮겨 봅니다.
순대 허리띠
어느 젊은이가 호주에서 유학을 했답니다.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했더랍니다. 학교 공부 이외에도 생활비를 버느라고 이런저런 이름으로 개최되는 유학생들의 모임조차 나가지 못했습니다. 남들이 거의 눈을 돌리지 않는 미장일을 배워 공사장을 따라 돌며 꽤 많은 임금을 받아 학비를 다 치르더니 공부가 끝날 무렵에 부모님을 호주로 초청까지 하더랍니다. 유학생들끼리 서로 돕는 마음은 기본인지라, 몇몇이 함께 부모님 마중도 갔고, 그 집에서 저녁 준비도 도왔답니다. 워낙 지독해서 공부도 잘하는 친구인지라 그 부모님이 어떤 분일지 자못 궁금했다지요. 부모님들을 맞아 자기네들 식으로 저녁을 차렸는데 잠깐 사이 어머님께서 순대를 숭숭 썰어서 큰 접시에 하나 가득 내놓으시더라는 것입니다.
몇 년 만에 아들을 만나러 가는 채비를 한껏 하신 어머니께서 준비한 것은 순대였습니다. 공부한답시고 타국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터에, 그 나라에서는 구경도 하지 못했을 순대가 가장 그리운 선물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함경도가 고향인 분들이라 순대를 그 집의 별미였고 유학 가 있는 아들도 순대를 제일 좋아하는 터라 몇 날 며칠 공들여 맛있게 만든 순대를 한 보따리 들고 공항에 나간 것입니다. 아들이 신세 졌을 주변 사람들 몫까지 푸짐하게 챙겨서 말입니다. 물론 다른 짐처럼 부친 것이 아니라 비행기 탈 때 들고 가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과일 하나도 갖고 갈 수 없는 공항 이민국에서 순대 보따리를 통과시킬 리가 없었지요. 며칠을 공들여 만든 순대였습니다. 어이없고 기가 막혀 진땀에 눈물마저 훔치는 어머니를 설득한 것은 순대를 버려야 비행기를 탈 수 있다는 세관원이 아니라 아버지였다지요. 어머니는 순대를 버리러 가서는 도저히,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그 가운데 가장 통통하고 긴 순대를 비닐 랩에 싸고는 치마 위 허리에 벨트처럼 두르고 웃옷으로 덮어 통과했습니다. 이민국 사람과는 눈도 맞추지 않았음은 물론 사리 밝은 남편이 무어라 할까 싶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순대 허리띠를 차고 가슴을 졸이면서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러고는 그 귀중한 순대가 터질까봐 허리를 구부리거나 뒤틀지도 못하고 의자에 기대지도 않은 채 꼿꼿이 앉아서 갔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호주까지 여덟 시간 거리지만 이륙 전후까지 합치면 열 시간 가까이 걸리고, 호주 공항에서 아들네 집까지 가는 자동차 안에서 보낸 두어 시간을 합하면 거의 열두 시간 넘는 동안 한 번도 의자에 기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그 아들에 그 어머니라며 감탄했다는 기발한 '그 어머니의 순대 허리띠 모정.'
웃고 계시는 거예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실 겁니다. 오늘 만난 시인 한 분은 역사적으로 보면 여자의 치마폭이 짦아질수록 여성들이 지닌 덕, 정, 참을성도 줄어드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긴 치마 때문이었는지 치마로 모든 것을 감싸고, 때로는 숨기며, 많는 것을 포용한 유별난 여성들이었습니다. 엄마, 어머니는 그 크기만큼 마음에 남는 것인가 봅니다. 생물에게 가장 원시적이고도 굳센 힘은 모정이라고 합니다.
5월은 성큼 성장하는 계절입니다. 발전이라는 단어와 사뭇 다른 느낌을 주는 '성장'은 언제나 안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봄철 나뭇가지와 대지에서 솟아나는 힘은 어떠한 현자보다 더 많은 것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며, 도덕적으로 순수해지게 만들지요. 아주 어린 잎들을 틔우려고 한겨울 내내 온몸을 더 딱딱하게 만들어두었던 나무가지들 이런 신비스러운 자연 앞에서 가당치도 않은 계산을 내세우거나 온전치 않는 이론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부끄러운 계절입니다. 봄날에는 콧노래를 부르다가도 문득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보면 마음에도 물이 오르기 때문인지, 철이 들어가는 것인지.... 이 계절이 주는 성장의 햇빛을 받으며 어버이날을 왜 5월에 넣었을까를 처음으로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머니 이야기만 하냐고요? 곁에서 지켜준 아버지들이 있었기에 어머니들이 이런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이겠지요. 2003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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